김보통 2021. 5. 20. 20:00

우울증 증상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 한다.

 

강도에 따라 다르지만 우울증이 심각해질수록 사람이 무감각해졌다.

외부의 자극은 그대로인데 그런 것들이 아무래도 좋을 것처럼 여겨졌다.

 

그게 밖을 왔다갔다하는 발소리든 나를 걱정하는 목소리든

 

그냥 모든 게 너무 힘들고 귀찮아서 나를 내버려뒀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생각했다.

 

그 당시에 남긴 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손끝부터 연해지는 기분이다.
존재하는 신체의 말단부분부터 서서히 희미해져서 감각으로부터 멀어지고 무던해지는 기분이다.

아니면 목에서 뜨거운 눈물이 차오르는 기분이기도 하다.
마취제의 차가움만큼이나 뜨거운 울컥한 감정이 목에서 올라와 맴돌기도 한다. 
모순되는 표현같지만 정말로 그렇다. 

내 머리에 총구를 갖다대는 상상을 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미래에 그럭저럭 행복하게 사는 나를 꿈꾸기도 하지만
마음 어딘가에서는 저 차가 나를 향해 달려왔으면 싶기도 하다. 

이렇게 냉탕과 온탕을 삼백번쯤 왔다갔다하면 내가 정상인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남들도 세상은 힘들다고 하고 그러면서도 다 제몫을 해내면서 잘 살고 있는데,
내가 어딘가에서부터 잘못되서, 비정상이라서
남들이 스스로 갈길을 다 걸어가고 있는데

나만 이자리에서 계속머물러서 비참한 자기연민에 빠져
객관적인 눈을 잃어서 한탄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죄책감과 무기력에 범벅된 새벽을 보내고 나면

느즈막히 일어나서는 게으른 나 자신에 대한 자아비판을 한번하고는 스스로를 조금 더 질색하게 된다. 
손톱 거스러미를 뜯다가 연한 새살까지 파헤쳐버린 기분이다.
지혈을 하고 밴드를 두른 손가락이 두근두근 하듯이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는 존재감이 자꾸 보라고 주장을 하는 것이다.
새살이 차오르고도 그부분은 약해서 계속 거슬리고 멈칫하게 된다.
그리고 또다시 건조해져서 거스러미가 생기고 무의식적으로 그 부분을 계속 후비게 된다. 
보지 않으면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투명한 방에 갖힌 느낌이다.
투명한 벽 너머에 있는 손을 향해 뻗어도 날카로운 유리의 벽뿐

 

일기나 예전에 쓰던 핸드폰을 좀 더 찾아보면 몇 개 더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이런 말을 남긴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것 같아서 글을 쓰지 않게 되었다.

 

이런 걸 남긴 건 그냥, 누군가에게라도 말하고 싶었다.

우울증이란 이런거라고

알아달라고

 

운이 좋게도 나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는데도 그게 와닿지가  않았다.

스스로에게 유리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그들이 걱정하는 나와 내가 다르기라도 한 것처럼

 

그때의 나는 내면이 완전히 전소되어 무엇에도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분명히 허기진  상태인데 배고픔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대부분이 그랬다.

 

의외로, 눈물이 나지 않는다.

눈물이 날 만큼 슬픈 일이 없었다.

모든 것에 무감각해지니 슬퍼도 무감각할 뿐이었다.

 

 

꽤나 오랜 시간을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좋아졌다가도 나빠지는 것을 긴 주기로 반복해왔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좋아지더라도 

문득 결국 다시 나빠질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좀 우습게도, 나쁜 순간에도 다시 살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별거 아닌 순간이었다.

침대에 멍하니 누워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떠다니는 먼지가 반짝이는 걸 보다가

몇년전에 본 문구가 가만히 떠오르곤 했다.

 

"넌 죽고 싶은게 아니라,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거겠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울증의 가장 슬픈 점은 그 상황을 벗어 날 수 있는 방법이 눈앞에 들이밀어져 있어도

그 방법을 실행할 에너지가 없다는 것이다.

 

내면이 완전히 전소되어

무엇에도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몸을 움직여 밥을 먹고 몸을 씻는 아주 간단한 일조차도 버거웠다.

 

그저 가만히 방 안에서 낡아가고 싶었다.

먼지처럼 사라져서 아무것도 남지 않게

 

 

그렇게 텅 빈 진공상태에 부유하는 것만 같았던 내가

어쩌다가 아직 살고 있는지는 다음에 적겠다.